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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기/India

인도여행 50 - 멍 때리기


오르차에 도착한 후,
간만에 기차나 버스가 아닌곳에서 실컷 잠을 잔 것 같다.


그런데 이 동네가 참 특이한 것이,
마을 중앙에 있는 예배당에서 아침만 되면 웬 종교음악을 커다란 스피커로 크게 틀어놓는다.
덕분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그 음악소리에 맞춰 깰 수 밖에 없었는데,
얼마나 지겹도록 들었는지, 며칠 후 오르차를 떠날즈음엔 나도 모르게 그 음악을 흥얼거리곤 했다.


그렇게 첫날 아침 역시 광기어린 종교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때마침 우리를 이 숙소로 안내해줬던 남자도 오전에 오르차를 떠났는데.
그 전에 우리에게 마지막 팁이라며 한가지 얘기를 해주고 갔다.


"오르차에서 유적지 가려면 통합입장권을 사야 되는데, 사실.... '뒷길'로 들어가면 공짜예요."

에이 참,
그럴리가 ^^

그리고 까짓꺼, 그냥 돈내고 들어가면 되지 뭘 또 ^^;




하지만 그가 떠난 그날 아침부터,
우린 아침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마치고,
그 놈의 '뒷길' 이 어디있는지 동네 골목길을 샅샅이 뒤져보고 있었다.

사실 그건 그저 우리의 순수한 '지리학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퍽이나^^)


일단 정문을 확인해본 결과,
확실히 표를 사야만 입장할 수 있었고,
대체 그가 말한 '뒷길' 이라는 건 어디에 존재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뭐 가족오란관도 아니고, 힌트라도 주고 가지 이 사람아.)

결국 우린 포기하고 옆에 난 주차장 길을 따라 한적하게 주변이나 구경하기로 했다.




길을 쭉 따라가니,
사방에는 무너진 옛 성벽과 주거지역, 우물들이 널려있었다.

각 건물 앞에는 문화재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었지만,
녹슬고 거미줄이 쳐져 있는걸로 봐선, 단 한번도 관리되지 않은 것 같다.

하기야 특별히 이곳을 찾는 사람도 없고,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채, 그 자리에 그냥 버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바닥에 널린게 문화재고 유적지인 이 동네.


만약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한참을 성곽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우연히도 아침에 그가 말했던 '뒷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뒷길이라고 하기도 뭐한,
그냥 옆으로 살짝만 돌아가면 대놓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정문에서만 요금을 받고, 나머지 출입구에서는 돈을 안받는 이 시스템..


아니, 관리가 뭐 이래??




안으로 들어가보니, 궁전 규모가 꽤 컸다.
조그만 시골마을에 뜬금없이 이 정도 규모의 궁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건물벽을 바라보며 한때 잘나갔던 왕국의 위엄을 떠올려 보았다.
한때는 이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생활했을텐데.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산책하고, 축제를 열고.

하지만 지금은 부식된 돌벽만이 남아있다.




사실 성 안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
그저 미로처럼 얽힌 길을 걷고, 숨겨진 공간을 찾아보는 정도다.

마치 '게'가 자라면서 탈피를 하고나면 껍데기가 남듯이,
그 껍데기를 보는 느낌이다.

그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제 없다.




이곳에서는 바라보면,
360도에 걸쳐서 오르차 주변 모든 곳을 내려다 볼 수 잇다.

조그만 오르차 시내,

그리고 언덕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그곳을 메운 빼곡한 숲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원한 강물.




탁트인 곳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넉놓고 경치 구경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가진건 시간밖에 없었고,
배가 좀 출출하다 싶으면 가지고 간 오렌지를 먹으면 됐다.


같이 갔던 누나와는 옥상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고보면 여행을 떠날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던 걱정들이 어느순간 모두 사라져있었다.

다음주까지 마감해야 되는 일은 어쩌지?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하지?
각종 복잡한 집안일, 청춘사업, 진로문제, 인간관계...

이런것들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더 이상 내게 있어서 고민거리가 아니였다.

요즘은 그냥 '오늘 아침은 뭘 먹지?' , '내일은 어딜 가볼까?' 정도가 그나마 있는 고민의 전부였다.


혹시 장자가 꾸었다던 '나비의 꿈'을 지금 내가 꾸고 있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한국에서 내가 했던 고민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거나' ,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 멍- 멍하니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여유롭게 그리고 한가롭게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여행을 하면서도 뭔가 다급하게 쫓겨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다시금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시간이 되는 것같다.




어느덧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때마침 해가 천천히 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오르차에서의 첫날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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