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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기/India

인도여행 84 - (네팔) 추위와의 싸움


저녁이 되자,
숙소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1층에 있는 난로로 모여들었는데,

내가 보기엔 굳이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어서 왔다기 보다는,
아마 2층방에 혼자있으면, 다음날 영락없이 냉동된 시체로 발견 될 것 같았기 때문일게다.

나 역시도 추위때문에 커다란 난로 한켠에 발을 뻗고 앉아,
일행들과 한국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불이 약해지지않게, 장작을 쉴틈없이 난로에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같이 불을 쬐고 있던 멕시코 여자분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알바로 돈을 벌어서 세계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알바하고, 좀 모이면 다시 여행을 하고..

이건 무슨 '알바 -> 여행 -> 알바 -> 여행 -> 알바' 같은 무한 순환 시스템인 셈인데,
처음 들었을땐, 뭐 이런 지하철 2호선 같은 인생이 있냐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그 누구보다 즐거운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난로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2층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사실 다음날, '푼힐전망대' 에 올라가 일출을 봐야했기 때문에,
그나마 일찍 잠자리에 든 셈인데,

아마 다음날 일출 스케쥴이 아니었다면,
분명 '난 이곳에서 난로와 함께 평생을 살꺼야!!' 라며 깽판을 쳤을게 분명했다.




'똑- 똑-"

다음날 새벽.
숙소아저씨의 노크로 잠이 깼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정확히 새벽 5시다.

어젯밤에 깨워달라고 부탁은 했었지만,
9시뉴스 종이 울리듯 이렇게 정확히 깨워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잠결에 주섬주섬 얇은 쟈켓 하나만 걸치고,
탁자위에 놓인 손전등과 카메라만을 집어든 채 밖으로 나왔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무작정 일출을 본답시고 숙소밖으론 나왔지만, 이건 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때마침 여기저기서 손전등 불빛이 클럽 싸이키 마냥 요란하게 움직였는데,
다른 숙소에서 나온 여행자들도 푼힐전망대로 향하는 듯 보였다.
무작정 그 사람들을 따라가보니, 역시나 푼힐 전망대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같이 숙소를 나왔던 일행들은 이미 어둠속에 묻혀버린지 오래였고,
나는 그저 손전등 불빛에만 의지한 채 혼자 산길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뜰까봐,
나는 거의 뛰다시피 빠르게 산을 올랐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해가 뜨려고 하고 있었다.


내 숨소리만 들릴 만큼 모든게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점차 빨갛게 물들어 가는 하늘은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이윽고 푼힐 전망대에 도착했다.
다행히 내가 도착할때까지 해는 뜨지 않았고, 역시나 일행들도 보이지 않았다.


'POON HILL' 이라고 적힌 표지판에 도착하자,
뭔가 이뤄냈다는 성취감에 혼자 '야호~' 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이때쯤 되서야 '몸이 너무 추워지고 있다'는 상황을 눈치챘다.

하기야 옷차림부터가 동네 슈퍼마켓 갈때 패션으로 나온데다가,
점차 땀이 식어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전히 해가 안떴다는 점.
심지어 여긴 해발 3200m 라는 점.

...나는 조금씩 미칠듯한 추위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주변에 보이는 외국 사람들은,
죄다 '파카'에다가 털모자,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왔다.


나만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가운데..

칼날같이 불어대는 바람앞에서,
일행들은 언제쯤 올라올지 알 수 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손바닥을 비벼대는 것에도 한계를 느낀 나머지,
주변시선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국민체조와 팔벌려 높이뛰기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내겐 이미 '자존심' 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이 추위에서 살아남아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후에는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않아,
주변에 떨어진 나무기둥을 벤치프레스 삼아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삼청교육대를 방불케하는 나의 이 모습은,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충분히 'What the hell...' 이란 문장을 읊조리게 할 만했다.




주변 사람들은 한가로이 대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을 무렵,

나는 여전히 생명연장의 꿈을 담은 체조를 해대며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체조도 지쳐갈즈음,
나는 뜻하지않게 전망대 옆에서 '따뜻한 커피'를 팔고 있는 현지인을 발견했다.


'그래, 이거야..'




오아시스를 발견한 마음으로,
냉큼 달려가서 커피 한잔을 달라하니,
'120루피' 를 달란다.

커피믹스에 그냥 물부어서 주는게 120루피라니..

완전 바가지 가격이지만,
일단 뭐라도 따뜻한 걸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주저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이 몇번 허공을 가른 후에야,
나는 비로소 지갑을 안가져왔다는 슬픈 현실을 깨달았고,

결국 커피파는 녀석에게
'잠시후에 일행이 올라오면 돈을 줄테니, 커피 먼저 지금 마시면 안되냐.' 는 드립을 쳤다.



당연히 커피장수는 '그건 좀 어렵다.' 라는 반응을 보였고,



오랜시간 추위에 벌벌 떨며,
생존을 위한 독기를 품고 있던 나는..

덜덜떨리는 이빨을 굳게 문 채,
최대한 정중히 다시 한번 요청했다..







"일단 커피 내놔.."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뜻밖에도 애절한 내 부탁때문인지,
그 녀석에게 커피를 한잔 얻을 수 있었고,
나는 따뜻한 커피잔에 손을 녹이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물론 다시한번 푼힐 전망대에 오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지금 확실히 느끼고 있는 것은,
해뜨기 전에 일찍 올라와봐야, 추위와의 싸움만이 존재할 거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