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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기/India

인도여행 74 - (네팔) 사진 속에 나


보드나트를 다녀온 후,
그날 저녁 숙소에서 누나와 조촐하게 술 한잔을 하려고 했었다.
물론 카트만두 와인샵에서 산 위스키와 럼주, 그리고 각종 과일, 과자도 미리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나니,
몸에 조금씩 열이 나고 복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젠장, 설마 또 뭘 잘못 먹었나?'

문득 바라나시에서의 '감기+몸살+설사' 종합선물셋트 크리티컬이 다시금 악몽처럼 떠올랐고,
나는 도저히 술을 마실 상태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너 얼굴이 왜그래?"

누나는 내가 몸상태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신내림 받은 무당마냥 날 척보더니, 일단 푹 쉬라고 얘기를 해줬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이나 정리하기로 맘을 먹었다.

카메라 액정을 보면서,
그동안 여행지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쭉 돌이켜보니,
풍경사진은 둘째치고,
내 얼굴이 제대로 나온 사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제대로 안나왔다' 는 것은,
흔히 말하는 '안 이쁘게 나왔다' 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얼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나왔다는 것인데,

가만히 이 사진들의 공통분모를 조합해보니,
모두 '누나'가 찍어준 사진이라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었다.


뭐, 사실 내 카메라가 DSLR 이다보니,
다른 사람이 다루기에는 아무래도 복잡한 감이 있는게 사실이지만....



"찰칵-"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처음부터 나를 당황시켰다.

먼저 우다이뿌르에서 찍은 사진은,
렌즈의 촛점과 빛 조절이 전혀 맞지 않는 상태로 나를 찍어줬다.


덕분에 나는 대놓고 내 얼굴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사진을 한장 건졌고,


누나에게 다급히 빛 조절을 하는 방법을 알려준 후,
다시한번 사진을 부탁했다.



"찰칵-"


그리고 빛 조절을 한 후에 나온 사진은,
나를 완전한 암흑속으로 보내버렸는데,
이것은 누나가 더이상 내 얼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미 내 얼굴은 배경에 일부로만 인식 될 뿐이었다.



"잘 찍고 있는거지?"


아메드바드에서 우연히 만난 후,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니면서, 누나의 풍경사진 실력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하지만 인물사진만 찍으면 언제나 내 얼굴 부위는 촛점을 잃은채,
뒤에 있는 배경만 또렷하게 나오기 일쑤였고,

자이살메르에 있는 가디사가르 호수에서 찍은 사진을 통해,
나는 다시한번 분명히 느꼈다.


'역시 누나는 풍경사진만을 찍고 싶어 하는구나.'



"나 잘 나오고 있는거지?"


우리가 어느덧 타지마할에 도착할 때 쯤엔,
누나의 사진기술은 다시한번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고맙게도 사람에게 어느정도 촛점을 맞춰주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하지만 나를 찍어준 사진들을 보면,
또 다른 특징이 보이기 시작했다.


뒷 배경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사진에서 내 비중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가끔은 옆에 있는 다른 관광객보다 작게나오는 나를 보면서,
나는 마치 '월리를 찾아라' 에 나오는 윌리가 되어갔다.



"찰칵-"


네팔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이제 내가 나왔다고 말을 안해주면,
모르고 지나갈 법한 사진들이 누나를 통해 찍혀지기 시작했다.


기껏 포즈를 잡고 서있으면,
여지없이 멋있는 풍경사진이 나오고야 마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누나에게

"우와~ 나~ 여기있네!"

라고 카메라 액정위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빙그레 웃는 것 뿐이었다.



보드나트에서 "찰칵-"


그러고 보니 오늘 낮,
보드나트 사원에 도착했을 때,
누나가 내게 말했다.


"저기~ 건물에 올라가봐~ 내가 사진 찍어줄께 ^^"

조금 불길하긴 했지만,
나는 내 카메라를 건네주고,
자그마치 4층 높이의 반대편 건물로 힘겹게 올라가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누나에게 물어봤다.


"지금 나 제대로 찍었지??"


누나는 말 없이 손으로 OK 사인을 보냈었고,


지금 숙소에서 카메라 액정을 통해 그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나는,
아무말 없이 Delete 버튼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